목차
2021년 개봉한 킹 리차드(King Richard)는 세계 테니스계를 지배한 비너스 윌리엄스와 세리나 윌리엄스 자매의 성공기를 그린 실화 기반 영화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단순히 두 스타의 전설을 다룬 전기 영화가 아니다. 작품은 이들의 성공 뒤에 있었던 아버지 리차드 윌리엄스라는 한 남자의 신념과 전략, 집념과 희생을 정면으로 다룬다.
그는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했고, 누구보다 가족을 밀어붙였다. 동시에 그는 꿈을 믿었고, 그 꿈을 계획으로 바꿔 실현했다. ‘킹 리차드’는 바로 이 계획된 위대함에 대한 이야기다.
🏠 컴튼에서 시작된 78페이지의 인생 계획서
영화의 무대는 로스앤젤레스 남부의 빈민가인 컴튼(Compton). 총성과 마약, 갱단이 일상인 거리에서 리차드 윌리엄스는 다섯 명의 딸을 키우고 있다. 그 중에서도 비너스와 세리나, 두 딸을 세계 최고의 테니스 선수가 되게 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운다. 그것도 단순한 꿈이 아닌, 78페이지 분량의 인생 설계서를 만들어 철저히 실행해나간다.
리차드는 테니스를 배워본 적도, 경기장을 밟아본 적도 없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자료를 독학하며 테니스 전략과 교육 이론을 익히고, 자신만의 철학을 구축한다. “부족한 것은 환경이 아니라, 믿음과 기준”이라는 그의 신념은, 자칫 허황돼 보일 수 있는 꿈에 점점 실체를 입힌다.
그의 접근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딸들이 부정적인 자극에 노출되지 않도록 항상 통제하고, 학업을 우선으로 두며, 미디어와 조기 성공을 경계한다. 그는 사회의 시선이나 코치들의 방식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녀를 길러낸다.
👨👧👧 아버지의 독선인가, 전략가의 철학인가?
이 영화가 진짜로 묵직하게 다가오는 지점은, 리차드가 결코 완벽한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자주 독단적이고, 주변 사람들의 조언을 무시하며, 아이들에게 무리한 기대를 걸기도 한다. 심지어 아내 오라신과도 갈등을 겪으며, 딸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리차드는 단순한 ‘헬리콥터 대디’나 독재자가 아니다. 그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재능과 가능성이 묻혀버리는 수많은 아이들을 봐왔고, 그런 현실 속에서 자녀들이 그 길을 반복하지 않도록 전투하듯 살아간 아버지였다.
윌 스미스는 이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인물을 그 누구보다 정밀하게 연기한다. 단순히 ‘감동적인 아버지상’으로 표현하지 않고, 이면의 상처와 두려움, 집념과 자책까지 담아낸다. 특히 딸을 믿지만 불안해하는 눈빛, 말과는 다른 행동에서 드러나는 깊은 내면은 관객에게 오랜 여운을 남긴다.
🎾 테니스보다 더 치열했던 삶의 경기
이 영화는 경기 승패보다는, 그 이전의 삶에 집중한다. 비너스가 프로 데뷔를 준비하는 순간까지의 모든 과정—낮에는 훈련, 밤에는 학습, 부족한 자금으로 코치에게 문을 두드리던 시간, 비가 와도 연습을 멈추지 않던 날들—그 모든 것이 한 편의 드라마다.
특히 영화는 자매가 경기장에서 경쟁하는 것이 아닌, 서로를 지지하며 함께 성장하는 과정을 따뜻하게 그려낸다. 이는 단순히 스포츠 영화를 넘어서, ‘가족 드라마’로서의 깊이도 보여준다.
또한 이 작품은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 경로’에 순응하지 않는 방식으로 성공을 설계한 리차드의 전략을 통해, 교육과 양육, 사회 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리차드는 말한다.
“나는 그들을 돈 많은 아이로 만들고 싶은 게 아니다. 위대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이 말은 곧, 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다.
🎬 섬세한 연출과 강렬한 연기 앙상블
감독 레이날도 마커스 그린은 이 거대한 서사를 조급함 없이 차분하게 풀어낸다. 리차드의 이야기를 서서히 쌓아가면서도, 곳곳에 유머와 따뜻한 감정을 배치해 관객의 몰입을 유도한다. 테니스 장면은 속도감 있게 연출되었지만, 결코 기술적인 과시에 머물지 않는다. 항상 인물의 감정이 중심이다.
윌 스미스는 이 작품으로 생애 첫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그의 연기는 한 인물의 열정, 사랑, 고뇌, 약함까지 모두 껴안는다. 결코 쉽게 공감할 수 없는 캐릭터를, 끝내 이해하게 만드는 설득력 있는 연기다.
그의 파트너로 등장하는 안제뉴 엘리스(오라신 역) 역시 묵직한 존재감을 보여주며,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딸들을 뒷받침하는 어머니의 힘을 보여준다. 또한 아역 배우 **산야 시드니(비너스 역)**와 **데미 신글레턴(세리나 역)**는 실제 선수처럼 경기 장면을 소화하며, 내면의 변화까지 정교하게 표현해냈다.
🧭 ‘위대함’에 대한 재정의: 킹 리차드는 무엇을 남겼는가?
킹 리차드는 관객에게 묻는다.
“성공은 운과 재능의 산물인가, 아니면 믿음과 준비의 결과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미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러 관점 속에서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관객 스스로 답을 찾게 한다. 리차드 윌리엄스는 전형적인 영웅도, 완벽한 부모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믿고, 설계하고, 버티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두 딸은 그 믿음 위에 세계의 중심에 섰다.
📌 총평: 킹 리차드는 성공 이전의 ‘과정’을 존중하는 영화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스포츠 영화나 전기 영화의 틀에서 벗어나, 성공의 과정, 가족의 의미, 믿음과 전략의 힘을 깊이 있게 다룬 수작이다. ‘승리의 순간’보다 ‘희생과 갈등의 순간’을 중심에 둠으로써, 더 오래 남는 울림을 남긴다.
리차드 윌리엄스의 방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가 사랑을 실천한 방식은 결과로 증명되었다. 킹 리차드는 그의 방식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그 신념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영화다.